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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도 좋아, 가끔은 Travel Abroad

론다(Ronda) 여행

by 응댕이를쳐라옹 2019. 11. 5.

[스페인포르투갈패키지여행 #10] 

 

 

세비야에서 론다로 넘어가는 길엔 드넓은 해바라기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두 시간을 버스로 달리는 동안 몇 번이고 마주한 풍경. 넋을 놓고 바라보다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대가 높은 마을이 으레 그렇듯, 경사진 노면과 좁은 골목 사이사이로 건물이 들어서 있다. 도시 전체가 전반적으로 굉장히 조용한 느낌이었는데, 1년에 한 번 열리는 투우 경기 시즌에는 스페인 전국의 투우 마니아들이 론다로 몰려든다고 한다. 

 

 

다른 도시에도 오래된 시가지가 많지만, 론다의 건물들은 고풍스럽기 보다는 다소 낙후된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절벽 위에 있는 만큼 접근성이 떨어지다 보니 수리가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메인 거리를 따라 내려가가 보면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역사적인 투우장, 플라자 토로스 데 론다(Plaza de Toros de Ronda)가 나온다. 그러고 보니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헤밍웨이의 역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표지에도 황소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헤밍웨이는 이곳에 머물며 론다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걸작을 완성시켰던 것. 소설 속 조던과 마리아의 사랑이 싹튼 게릴라 부대의 은신처가 이 곳의 깎아지른 협곡 어딘가였을 수도 있다니, 감회가 새롭다. 

 

 

1785년에 지어진 유서깊은 투우장 앞에는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마타도르(투우사 중에서도 소와 정면으로 맞서는 중추 역할), 로메로와 오르도네즈의 동상이 서 있다. 특히 페드로 로메로는 5,600여 마리의 소를 죽인 전설의 마타도르로, 3대에 걸쳐 유명세를 떨친 로메로 가문의 마타도르 가운데서도 최고의 승률을 자랑한다. 기존의 투우는 귀족들이 말을 타고 소와 대적하는 형식이었지만, 페드로 로메로의 할아버지인 프란시스코 로메로가 대형 경기장에서 맨몸으로 소를 다루는 근대의 투우를 창시했다고 한다.

 

 

경기가 있는 날이 거의 없기 때문에 평소에는 박물관으로 운영이 되는데, 투우장 자체 가이드를 동행하는 형태의 관람만 가능한 관계로 우리 팀은 외관 구경만 진행했다. 투우는 국제적으로도 동물 학대, 투우사의 안전 등에 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아, 현재는 스페인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기 진행이 금지되어 있다.

 

 

다만 론다팔마 데 마요르카와 같이 투우를 빼놓고서는 온전히 그 정체성을 논할 수 없는 남부 소도시 일부에서는 엄격한 제한을 두고 경기가 치러진다고. 예를 들면, 소에 창살을 던져 가해한다거나 죽일 수 없으며, 18세 이상만 관람이 가능하고 주류 반입을 금지하는 등의 조항들이다. 전통 방식을 선호하는 일부 마니아 층들은 이렇게 진행되는 투우 경기가 투우 본연의 재미를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투우장에서 두 블록만 내려가면 론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누에보 다리로 가는 헤밍웨이의 산책로가 나온다. 말은 산책로이지만 천길 낭떠러지 옆이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걸어야 한다. 멀리 탁 트인 대지를 관람할 수 있는 간이 전망대가 살짝 보인다.

 

 

산책로의 시작점인 이 간이 전망대는 사방이 탁 트여 있는 첫 번째 관람 포인트이기 때문에 아주 매혹적이지만, 가느다란 철창으로 만든 허술해 보이는 난간 외에는 안전장치가 없어 가이드 분께서도 오래 머물기를 추천하지 않는 장소였다. 이유는 잠시 후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간이 전망대에서 왼편으로 펼쳐진 론다의 절경. 3세기 로마 시대 때부터 시작해서 700년에 달하는 무어인 통치 기간은 물론, 레콩키스타로 탈환된 이후에도 스페인 내전에 이르러서까지 군사적 요새로 쓰였다고 하니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 이면에 얼마나 기구한 역사가 녹아 있을지 이방인의 가슴으로는 감히 가늠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질곡의 역사를 품은 아득한 절벽. 토양층의 곡선이 투박하지만 아름답다. 이 절벽을 따라 쭉 걷는 구간이 산책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찾을 수 있는 이러한 하얀 건물이 밀집된 마을을 푸에블로 블랑코(Pueblos Blancos)라고 칭하는데, 하얀 마을이라는 뜻이다. 

 

 

화이트 빌리지(white villages)라고 영문으로 검색하면 자동차로 자유 여행 시 유용한 코스 정보를 꽤 얻을 수 있다. 론다도 이 하얀 마을 중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지만 다른 여러 하얀 마을을 묶어서 투어하는 코스가 지역 호텔 등에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 하얀 마을 일대에는 구석기 시대 벽화는 물론 신석기 고인돌, 청동기 시대 유적, 로마 시대에 건설된 도로 등 고대 유적 또한 풍부해서 관련 투어가 알음알음 진행되고 있다. 고고학이나 역사에 조예가 깊다면 자유 여행으로 방문하시기를 추천드린다.

 

 

절경에 취해 걷다가 잠시만 뒤를 돌아보면, 아까 왜 가이드 님이 간이 전망대에 오래 서 있는 것을 만류했는지 알 수 있다. 금방이라도 똑 부러질 것만 같은 모습이 위태로운데도, 왜 아직 저 상태로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타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될 수 있으면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상책. 누에보 다리 쪽 풍경이 더 멋지니 산책로 초입의 전망대는 피하는 것을 권유하고 싶다.

 

 

하늘과 맞닿은 하얀 건물들의 모습이 마치 장난감 마을 같다. 하지만 그 아래로 이어지는 협곡은 절대 장난스럽지 않다는 것. 관광객이 많이 지나다니기 때문에 앞뒤 양 옆은 물론 발밑도 잘 살피도록 하자.

 

 

드디어 누에보 다리(Puente Nuevo)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에보는 '새로운'이라는 뜻인데, 1735년에 8개월 만에 완공되었던 다리가 무너지면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자 이후 42년에 걸쳐 1793년 새롭게 지어진 다리가 바로 누에보이다. 단순한 네이밍 속에 단순하지 않은 교훈이 숨어 있는 것이다. (부실공사 근절!)

 

 

그런데, 누에보 다리의 거대한 아치 위로 수상한 문이 하나 보이는 것이 심상치 않다. 무서울 것 같기도, 낭만적일 것 같기도 한 저 방은 스페인 내전 당시 정치범을 수감하는 감옥으로 쓰였으며 한 때는 술을 파는 바로 운영된 적도 있다고 한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죄수들을 고문하는 와중에 창 밖으로 던져 죽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이 다리의 초반부 건축에 참여했던 건축가도 이곳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멋진 야경을 감상하기에 제격이었겠지만 술집으로 사용하기에는 여러모로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아득한 절벽 위에서도, 옹기종기 모여 구도시에 활기를 더하는 가게들.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는 론다 사람들의 모습이 다리에 엮인 짙은 우울감을 덜어낸다. 거리의 버스커가 연주하는 기타 소리에 제비들도 춤추는 듯했다.

 

 

 

도시 중심의 작은 광장으로 뻗은 다리 위 도로의 모습. 협곡 아래까지 닿아 웅장해 보이는 다리의 직선거리는 막상 그리 길지 않다. 론다는 마치 대만의 지우펀처럼, 고요한 아침 풍경이나 해질 무렵의 정취를 느끼기 위해 일부러 1박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당일치기로 들르는 도시이다. 

 

 

해발 723m에 지어진 소박한 풍경의 소도시 론다의 인구는 4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태백시와 비슷한 고도와 인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광장을 지나 거리 안쪽으로도 구석구석 활기를 띤 작은 가게들이 많았는데 세비야에서 이미 많은 에너지를 쏟은 터라 광장 근처에서 쉬는 편을 택했다.

 

세비야에서의 고군분투기는 아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mintviolet.tistory.com/20

 

세비야 여행 스페인소매치기 체험 [스페인포르투갈패키지여행 #9]

스페인 포르투갈 패키지여행 6일 차를 꽉 채운 세비야 여행. 단연 스페인 광장과 세비야 대성당이 세비야 여행의 하이라이트이다. 특히 세비야 대성당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과 더..

mintviolet.tistory.com

 

 

광장 정면으로 누에보 다리와 마주보고 있는 아주 작은 젤라또 가게에 들렀는데 의외로 산미구엘 시장 앞 젤라또 집보다 퀄리티가 좋았다. 유머러스한 젊은 청년이 아이스크림 가게 사장인 것 같았는데, 맛 추천을 기가 막히게 잘 해준다. 기다리는 동안 입이 심심하다면 들러보시기를 추천한다.

 

 

다음 행선지는 그 유명한 그라나다. 이번 스페인 포르투갈 패키지 여행으로 방문하는 도시들 중 가장 남단에 위치한 곳이기에 체력을 아껴 둘 필요가 있다.

 

가는 곳마다 관광객에 치이는 느낌을 주었던 세비야에 비해, 불어오는 바람에서부터 여유를 느낄 수 있었던 론다. 절경을 이룬다는 석양을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번 일정에 포함되지 않은 휴양 도시 말라가를 방문하게 될 일이 언젠가는 있을 테니, 그때 다시 와 보는 것으로 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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